
1970년 5월 4일 정오 무렵이었다.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 블랭킷 힐 아래에서 방위군과 학생이 대치했다.
12시 24분에 총성이 시작됐다.
13초 동안 67발이 쏟아졌고 네 명이 쓰러졌다고 기록됐다.
피로한 얼굴의 병사들 사이로 소녀의 울음이 번졌다.
제프리 밀러의 곁에서 메리 앤 베키오가 팔을 벌리고 절규했다.
불씨는 며칠 전 던져졌다.
4월 30일 리처드 닉슨이 캄보디아 침공을 전격 발표했고 전국의 캠퍼스가 흔들렸다.
켄트 주립대에서도 5월 1일부터 사흘간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소요가 확산됐다.
오하이오 주 정부는 질서 유지를 이유로 주 방위군을 투입했고 교정은 군화의 발자국으로 채워졌다.
최루탄은 바람을 타 언덕을 넘었고 강의동 앞 잔디는 임시 집결지가 됐다.
확성기와 돌멩이 사이에서 오후의 하늘만이 아무 말 없이 맑았다.
사건의 정점은 5월 4일 낮이었다.
방위군은 시위대를 밀어내며 블랭킷 힐을 넘어 풋볼 필드 방향으로 이동했다.
일부 병력은 후퇴하듯 내려갔고 학생들은 동요와 야유 사이에서 거리를 유지했다.
잠깐의 정적 끝에 병사 28명이 돌연 뒤돌며 총구를 들었다.
사격 명령은 없었다는 말이 이어졌고 발포는 자위였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총알은 13초 동안 67번 공기를 가르며 학생들을 향해 날아갔다.

희생자의 이름은 명확했다.
앨리슨 크라우스와 제프리 밀러, 윌리엄 녹스 슈뢰더와 샌드라 슈어가 그날 숨을 거뒀다.
두 명은 시위에 참여했으나 두 명은 수업으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확인됐다.
부상자는 아홉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영구마비가 됐다.
이름과 나이, 그날의 마지막 동선까지 사건 파일에 정리됐다.
하지만 총구가 왜 회전했는지에 대한 문장은 비어 있었다.
조사는 곧 시작됐다.
닉슨은 ‘캠퍼스 소요 대통령 위원회’를 설치했고 스크랜턴 위원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위원회는 수십 건의 진술을 모았고 사진과 지도, 탄도 자료를 대조했다.
결론은 단호했고 수사 언어로 또렷하게 서술됐다.
“사격은 정당화될 수 없고 불필요하며 변명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보고서에 적혔다.
그러나 지휘 체계와 형사 책임의 고리는 이어지지 못했다고 평가됐다.

형사 처벌의 무게는 가벼웠다.
현장을 지휘한 장교들과 다수의 병력이 기소됐으나 중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974년 민사소송에서는 미 정부와 오하이오 주가 총 70만 달러를 보상했다.
소송은 합의로 종결됐고 법정의 문은 조용히 닫혔다.
판결문 바깥에서만 질문이 이어졌고 해답의 문장은 늘 미완성이었다.
사건의 책임은 도덕으로 남았고 법의 저울은 가벼웠다고 회자됐다.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 가지치기했다.
현장에서 녹음된 테이프에서 ‘Fire’라는 말이 들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음성 분석가는 미세한 명령어 흔적을 포착했다고 보고했고 발포 지시 가능성을 말했다.
다른 분석가는 잡음의 중첩이라고 반박했고 명령어 판독의 신뢰성을 공격했다.
녹음의 진위가 논란이 됐고 테이프의 파형이 해석 전쟁의 전장이 됐다.
결정적 명령의 유무는 끝내 상반된 결론 사이에 묶여버렸다고 요약됐다.
또 다른 축은 정보의 그림자였다.
테리 노먼이라는 학생이 FBI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이 거론됐다.
그가 시위대와 충돌하며 권총을 드러냈고 혼란을 유도했다는 서술이 보도됐다.
일부는 노먼의 행동이 방위군의 위협 인식을 키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조사와 공식 자료는 사건과의 직접 연관을 부정했다.
의혹은 반복 제기됐고 반론도 매번 되풀이됐다고 정리됐다
사전 모의설도 떠올랐다.
일부 병사가 사격을 예고했다는 증언이 점처럼 흩어졌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교차검증과 물적 증거는 빈약했고 법정에서 무게를 얻지 못했다.
계획과 우발의 경계가 흐려졌고 사건 설명은 분기점마다 달라졌다.
현장 지휘 체계는 복잡했고 분대 단위의 판단이 강조됐다고 진술됐다.
“각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라는 서사는 널리 공유됐다고 기록됐다.
그날의 동선도 재구성됐다.
방위군은 최루탄과 곤봉으로 집회를 밀어내며 언덕을 넘어섰다고 보고됐다.
학생들은 흩어졌고 다시 모였고 구호와 욕설 사이에서 거리를 바꿨다.
군은 철수하는 듯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뒤돌아섰고 총열이 올라갔다.
바람은 여전히 일정했으나 인간의 판단은 급격히 변했다.
사격은 한 덩어리의 시간으로 뭉쳤고 13초라는 숫자가 사건의 제명이 됐다.

국가의 언어는 사후에 더 매끄러웠다.
위원회 보고서가 인쇄됐고 사진과 도면이 첨부됐다.
대통령의 발언은 절제됐고 행정부의 입장은 반복됐다.
발포 명령은 확인되지 않았고 자위적 발포라는 설명이 유지됐다.
그러나 캠퍼스의 벽에는 다른 문장이 붙어있었다고 전해졌다.
“누가 사격하라고 했는가”라는 질문이 칠판에 남아있었다고 회고됐다.
피해자의 이름은 교정의 나무 아래에서 매년 낭독됐다.
앨리슨과 제프리, 샌드라와 윌리엄의 생일과 전공이 차분히 호명됐다.
한때 수업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춘 자리도 표시됐다.
그런데 발포의 출발점은 여전히 미세한 음절로만 존재했다.
명령인가 오판인가, 신호인가 우발인가의 갈림길이 비어 있었다.
역사 교과서의 단락은 분명했지만 미스터리는 그대로 보존됐다.

시간은 흘렀고 사건은 다시 읽혔다.
대학은 추모와 연구를 병행했고 기록 보관소의 상자들이 열렸다.
해마다 새로운 분석이 나왔고 반박과 재반박의 사설이 겹쳐졌다.
총구의 각도, 거리, 산탄의 궤적이 수치로 재가공됐다.
그러나 결정적 두 단어의 실체만은 결코 합의되지 못했다.
테이프의 미세한 공명은 여전히 사람마다 다른 말을 했다.
지금 남은 것은 질문이었다.
사격은 누가, 왜, 그 순간에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었다.
국가는 사과와 보상을 기록했고 형사는 끝내 귀결점을 만들지 못했다.
캠퍼스의 잔디는 다시 푸르러졌고 건물 벽의 흔적은 세월에 옅어졌다.
하지만 13초는 사건을 설명하는 유일한 숫자로 계속됐다.
그날 이후, 발포 명령의 유령은 기록 사이를 조용히 오갔다.